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폴란드 기병에 대한 왜곡 선전 === 이 전쟁에서 폴란드 기병대인 [[울란]]이 독일 전차에게 기창 돌격했다가 전멸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는 폴란드의 제18 포메라니안 울란 기병연대의 돌격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부대는 8월 26일 국경에 배치되었다가 9월 1일 5시에 공격을 받고 후퇴했고, 독일 보병연대가 점령한 국경도시 크로얀티를 탈환하기 위해 그날 저녁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독일 공군과 숲에 매복해있던 장갑차들에 의해 부대가 와해되었고, 후에 독일 종군기자가 이를 보고 "독일 전차에 랜스돌격한 멍청한 폴란드 기병들" 운운하는 식으로 프로파간다 기사를 써낸 게 널리 퍼진 것. 이에 대해 사실 전차가 골판지 전차인 줄 알았다느니[* 이 이야기를 그대로 쓴 책이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과 이를 참고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 그리고 [[전격전의 전설]]이다. 게임 [[SD 세계대전]]에서도 이 내용이 언급된다.], 포위된 상황이라 마지막 저항으로 돌격한 것이라느니 등 여러 이야기가 퍼져있으나 모두 거짓. [[기병]] 돌격은 폴란드 침공 내내 일반 [[보병]]이나 [[포병]] 부대를 상대로도 종종 행해져 성공했다. 말이 많은 대 기갑 부대 돌격도 퇴로가 끊기는 등 절망적인 경우에 이루어지긴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어느 특정 전투라 꼽을 것 없이 전역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폴란드군에서 기병이 상당한 비중(약 10% 가량)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폴란드군의 기병은 [[소총]]과 [[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한, 실질적으로는 오늘날의 [[기계화보병]] 내지 헬기 강습 보병과 같은 기동부대의 역할을 맡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신생국인 만큼 공업 생산성도 뒤떨어지고 기계화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기갑 차량 대신 말을 사용한 것뿐이었다. 즉 이들은 멍청해서 돌격한 게 아니라, [[희생|'''죽을 걸 알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돌격한 것이다'''.]] 또한 폴란드 기병대가 아무런 대책 없이 전차에 뛰어든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37mm 대전차포와 대전차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제한적으로나마 대전차전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다지 강력하다고 볼 수 없는 37mm 대전차포와 이미 시대에 뒤쳐진 무기가 되어가고 있던 대전차 소총이었지만, 1호 전차 및 2호 전차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화력이었고 37mm 보포스 대전차포는 500미터 거리에서 당시 독일군에 수백대만 배치되었던 3호/4호 전차 초기형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었다. 실제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1920년대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폴란드 기병이다. 그리고 일부 기병 부대들에는 이미 상당수의 [[오토바이]]와 [[트럭|수송트럭]], [[장갑차]]와 [[경전차]]가 군용 장비로 주어지는 등 부분적이나마 기병의 차량화와 기계화가 진행 중인 상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침공 이전에 폴란드 군부는 빨라도 [[1942년]] 이후에나 침공이 발발하리라 생각했기에 기계화 일정도 그렇게 잡아 놨다. 실제로 폴란드가 독일의 침공 위협을 느끼고 급하게 대비를 시작한 것은 1939년 중반, 즉 체코슬로바키아를 먹어 치운 독일이 다음에는 그단스크를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폴란드군이 기계화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독립 직후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간 [[폴란드 분할|분할 통치를 당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간신히 나라가 다시 수립되었다.]과 1920년대 국경선 문제로 야기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면서 폴란드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 폴란드 무역의 40%가 독일과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 및 1920년대 후반기에 들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폴란드의 무역 및 수출이 정체된 까닭이 컸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예를 들어 1929년 당시 폴란드의 1인당 [[GDP]]는 1933년까지 계속 추락하다가 이후 반등하여 1938년에 이르러서야 1929년의 수준을 회복했다. 또한 [[전간기]] 폴란드의 주요 지도자들이 공군 부대가 [[현대전]]에 끼치는 영향을 경시한 영향도 한몫했다. 실제로 전간기 '폴란드 공군의 설계자'라 불리는 공군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Ludomi%C5%82_Rayski|루도미우 라이스키]](Ludomił Antoni Rayski)나 공군 감독 [[https://en.wikipedia.org/wiki/J%C3%B3zef_Zaj%C4%85c|유제프 자용츠]](Józef Ludwik Zając), 라이스키의 후임 사령관 [[https://pl.wikipedia.org/wiki/W%C5%82adys%C5%82aw_Kalkus|브와디스와프 칼쿠스]](Władysław Jan Kalkus) 등이 폴란드 공군의 확충과 현대화를 부르짖었지만 상관들의 실수와 폴란드의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이 목표가 상당히 지지부진해졌다. 그리고 공군 확충론자들의 의견이 서로 맞는 것도 아니었는데, 줄리오 두헤의 영향을 받은 라이스키는 폭격기를 주요 공군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임하던 폭격기의 개발은 그 결과물이 시원찮았으며, 그 결과 1939년 시점에 폴란드 공군 전투기는 구식화된 [[PZL P.11]]가 주력이었다. 그리고 자용츠는 라이스키와는 반대로 전투기를 주요 공군력으로 삼으려고 했기에 라이스키가 퇴임하자 그의 폭격기 생산 계획 상당수를 엎어버렸다.[* 폴란드 침공은 결과적으로 라이스키가 아니라 자용츠의 의견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훨씬 현대화된 독일 공군의 전투기가 제공권을 장악하여 독일 공군 폭격기와 육군이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항공기를 수입하는 방안도 시원찮았는데, 당시 폴란드의 부족한 경제력으로는 외국에서 항공기를 사 와서 주요 전력으로 삼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1939년 전쟁 전야에 이르러서는 많은 종류의 신형 폴란드 공군기들이 개발되거나 계획 중에 있었지만 폴란드의 부족한 공업력과 경제력, 그리고 시간 문제로 인해 충분한 숫자가 생산되지 못하면서 패배로 이어졌다. 여기에 당시 폴란드 신형 항공기 주요 개발진의 잇따른 죽음이라는 악재도 있었다. 그리고 군사적, 경제적, 실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폴란드는 우치-르부프 일대에 중앙 산업 지대(Centralny Okręg Przemysłowy)를 건설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폴란드 침공이 발발하기 전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전격전의 전설]] 같은 책에서는 폴란드 정부와 군부가 자신들이 [[베를린]] 레이스를 펼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적어놨는데, 당시 폴란드 수뇌부는 자신들이 독일군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도 '''[[베를린 전투|베를린에 역으로 쳐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Hermann Graml: Europas Weg in den Krieg. Hitler und die Mächte 1939. Oldenbourg, München 1990, S. 187][* [[http://de.wikipedia.org/wiki/Polenfeldzug#cite_note-47|참고 자료]]] 사실 이게 당연하다. 국경선이나 국력, 전력 면에서의 열세를 잘 알고 있는데도 적국의 수도까지 쳐들어가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이런 선전 내용은 당시 독일 쪽에서 폴란드인들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전략의 일환이었는데, 폴란드인들을 '''교만하고 허황되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민족'''[* 다만 폴란드의 외교전략이 공세적이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이미 1차 세계대전 이후 조약과 승전으로 소수민족 거주지가 크게 늘어나 서부는 독일인, 동부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으로 인종구성이 복잡해져 이로 인한 다민족 집단의 반발로 민족민주당(ND)같은 폴란드 민족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는데 실패하고 연방자치제를 지지하는 피우수트스키 같은 인물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런 정책이 이상적으로 가진 않았고 '''폴란드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폴란드인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크게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으로 선전하려는 목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